
강릉시 성산면에서 오봉댐으로 가는 초입 우측의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영동지방에서 가장 처음 건립된 것으로 명종 11년(1556)에 함헌(咸軒) 최운우(崔雲遇)가 강원관찰사 윤인서(尹仁恕) 강릉부사 홍춘년(洪春年)과 함께 발의하여 창건한 서원이며 공자를 배향하고 있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서원 일람표에 의하면 “공자를 배향하는 서원은 함흥의 문회서원, 단천의 복천서원이 있을 뿐이다. 이 서원(오봉서원)에서 공자를 배향하는 것은 邱山이라는 지명과 공자의 화상이 보관되어있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공자의 화상은 함헌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것을 얻어 온 것이라 한다.후에 여기에, 주자와 우암 송시열을 함께 배향하게 되어 현재 집성사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좌우측 벽면에 세분이 모셔져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강당은 담장의 우측에 있어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 형태이다.
서원명 오봉(五峯)은 동리명으로 후면에 태백의 산줄기가 둘러 있고, 앞쪽은 청정한 오봉천이 흐르고 있어 지명 구산(邱山)의 뜻대로 속세를 떠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경관에는 무우정(無雩亭), 영귀암(詠歸岩), 연어대(鳶魚臺), 방도교(訪道橋) 등이 명명되어 있는데, 서원의 운치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숙종 7년(1681)에 왕은 전교를 내려 오봉서원은 비록 사액서원은 아니지만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곳이므로 사액서원과 같은 규칙을 준칙할 것을 허락하였고, 따라서 토지3결과 노비를 하사하였고, 학생정원은 20인이 되었다.
영조 37년(1761)에는 처음 봉안한 공자 영정이 너무 낡았기 때문에 모사ㆍ봉안하였고, 이후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도 함께 봉안하였다. 고종 5년(1868)에 비사액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되고 공자의 영정을 비롯한 장서 등은 향교에 이관하였고, 주자와 송시열의 영정은 연천 임장서원에 옮겼다. 그러나 1902년 제단을 다시 설치하였으나 3년후인 1905년 홍수로 파손되었고, 현 사우인 집성사는 1964년에 건립된 것이며, 강당은 1928년에 건립되었다. 또 기적비는 1806년에 건립한 것으로 글은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지었고, 글씨는 명필 제학 조윤대(曺允大)가 썼다. 묘정비는 1856년에 건립되었는데 글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짓고, 글씨는 판서 이종우(李鍾愚)가 썼다.
① 오봉강당(五峯講堂)
이곳은 서원 원생들이 강학을 하던 곳인데, 좌측에 우물마루가 있고 우측에 협실이 있는 전면 4칸, 측면 2칸 맞배지붕 형식이다. 자연석을 두벌대로 쌓아 기단으로 하고 시멘트 마감을 하였으며, 덤벙 기초 위에 퇴간의 전면 중앙기둥만 두리기둥으로 하고 그 외는 네모각 기둥으로 하였다. 좌측 마루는 현재 행사에 사용하는 제기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전면창호는 굽널 세살문, 그 외에는 울거미눌,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되어 있다.
협실 바닥은 시멘트 몰탈마감 위에 왕골 자리를 깔았으며 벽은 시멘트몰탈,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되어있고 창호는 두짝 세살문이다. 기둥 위에는 창방을 걸고 소로받침 위에 장혀를 두고 굴도리를 보내고 초익공 형식이다. 집의 구조는 팔작기와지붕 3량가로써 종도리에 ‘戊辰七月二日拾貳日戊申申時立柱上梁’이라는 글귀가 있어 1928년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② 칠봉사(七峯祠)
칠봉사는 함헌을 배향한 사당으로서 집성사와 나란히 하고 있으며 자연석 두벌대 쌓은 기단에 기초를 하고 전면은 두리기둥 그 외는 네모각기둥을 세웠다. 익공형식으로써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측면에 풍판을 달았다. 전면에 머름대를 두었고 창호는 세살문으로 하였다.
그 외 부속건물로써 사괴석 4단 쌓기 기단위에 화강석을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맞배지붕 형식으로 된 정면 출입구가 있다. 또 紀績碑를 보관하는 각(閣)은 맞배지붕 형식이며 양측면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1. <강릉시 문화재대관> 강릉시.1995
2. <강릉의 문화유산> 강릉시. 2000
3.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 강릉대학교 박물관. 강릉시.1995
4. <강릉의 문화유적> 강릉문화원. 1998
5. <임영문화대관> 강릉문화원. 1982
6. <강릉사우자료집> 강릉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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