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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11-19 09:59
[향토인물] 허난설헌(許蘭雪軒 : 1563~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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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이 낳은 천재 詩人 허난설헌은 明宗 18년(1563) 강릉 초당동에서 허엽(1517~1580, 字는 太煇, 號는 草堂)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초희이고 자는 경번, 난설헌은 그의 호이다.
  천재시인 난설헌의 소녀시절은 아버지 허엽의 관직생활로 부유하였고, 그의 詩세계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준 친 오라버니 허봉도 난설헌 열살 때 大科에 합격하고 열다섯 살 때 校理가 되는데, 이러한 오라버니의 출세도 감수성이 예민했던 어린 난설헌의 꿈을 한껏 부풀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난설헌은 14살 되던 해, 한 살 위인 교리 김첨의 아들인 김성립과 결혼을 하게 된다.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허봉이 호당의 동창이었고 또한 각별히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담이 이루어졌다. 안동 김씨 집안인 시댁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있는 집안이었고, 시어머니 송씨 역시 당대 경학으로 유명한 이조판서 송기수의 딸이었다.

  허균은 누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 마지않는다. 오호라, 살아서는 부부사이가 좋지 않더니, 죽어서도 제사를 받들어 모실 아들 하나도 없구나. 아름다운 구슬이 깨어졌으니 그 슬픔이 어찌 끝나리.《성소복부고》〈학산초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부부금슬도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던 난설헌에게 설상가상으로 밀어닥친 불행은 사랑하는 두 자녀를 차례로 잃은 일이었다. 그 충격으로 유산까지 하게 되는 등 불운이 연속되었다. 난설헌을 애지중지 하던 아버지 허엽은 난설헌 18세 되던 해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상주 객관에서 돌아가셨고, 가장 믿고 따랐던 둘째 오라버니 허봉 역시 난설헌이 21세 되던 해 東人에 속한 학자들과 栗谷을 논하다가 죄를 얻어 甲山으로 귀양 갔다 풀려난 후에도 한양에는 들어갈 수 없어 금강산을 떠돌다가 끝내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객사하는 비운을 맞게 되니, 난설헌의 비통한 심정을 그 누가 알았으리오. 허봉이 죽고 1년이 지난 27세 되던 해, 난설헌은 마치 자신이 지은〈몽유광상산시〉에 적힌 글귀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활화산 같이 용솟음치는 詩魂을 마음에 담은 채 난설헌이 그처럼 그리던 선계를 향해 이 세상을 하직했다.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여성의 삶의 목표가 되고 있던 시대에 현숙한 어머니와 어진 부인이 될 수 없었던 난설헌에게 단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활화산처럼 넘쳐흐르는 시혼의 분출이었다.
  난설헌의 시풍은 일찌기 오라버니 허봉과 당시 삼당시인으로 유명했던 손곡 이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주위의 사물을 매우 情感있게 묘사하고, 詩語에 있어서도 평이하고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점이 특징이었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 여덟살 되던 해〈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여신동이라 불리운 난설헌의 재능에 대해 허봉은 일찌기 경번의 재주는 배워서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이태백과 이장길의 유음이라고 할 만하다.(〈학산초담〉)고 극찬하고 있다.
1589년 3월 19일 꽃다운 나이 27살에 요절한 누이 난설헌의 재능을 애석히 여긴 동생 허균은 그 유고를 모아〈난설헌고〉를 편집하고, 1년 후인 1590년 스승 유성룡의 跋文도 받았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초간본이 나온 것은 선조 41년(1608)으로 난설헌이 세상을 떠난지 19년 후의 일이었다. 그 사이 난설헌의 詩는 헌신적인 허균의 노력에 의해 멀리 중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597년은 정유왜란의 해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明나라 원군이 조선에 들어오는데, 1598년 봄 명나라 시인 오명제가 조선의 시문을 모아《조선시선》을 엮는 과정에서, 당시 중국의 장군들을 접대하는 관직인 경리도감이었던 허성과 병조좌랑이었던 허균의 집에 오명제가 머물게 된 것이 난설헌 시가 중국에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606년 명나라 황실에 장손이 태어나자, 정사 주지번과 부사 양유년이 조서를 받들고 오게 되었는데, 그들을 맞이하여 접대하는 부서의 종사관이었던 허균은〈난설헌고〉초고를 이들에게 보이고 서문을 써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1606년 4월 주지번은 소인을 지어 주었고, 양유년은 12월에 제사를 지어 주자, 허균은 이에 자기의 발문을 붙여 1608년 4월 공주에서 출간하였던 것이다.〈난설헌고〉가 다시 간행되는 것은 숙종 18년(1692)인데 숙종 37년(1711)에는 日本으로도 건너가 분다이야 지로베이에(문대옥차랑병위)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 후 1913년에도 활판으로 간행되고 있다.
참고문헌 : 허난설헌과 강릉, 강원의 얼 선양교육, 문화수첩

<참고문헌>
1. <강원의 얼 선양교육>
2. <향토교본>
3. <문화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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