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공신 박제상을 모신 사당으로 겹처마 맞배지붕 양식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양식으로 지붕의 양측에는 풍판이 있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때의 충신으로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가 있는 눌지왕의 두 아우를 지략과 용기로 구출하고 자기는 순절한 충신중에 충신이다.
눌지왕은 볼모로 타국에 있는 두 아우를 걱정하여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에 제상은 신하로서 왕의 괴로워함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하여 왕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자청하여 적국이나 다름없는 고구려에 들어가 장수왕에게 “대왕이 우리 왕의 아우를 돌려 보내주는 일은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한개가 떨어지는 정도의 미미한 것이지만 우리 임금에게 대왕의 덕은 하늘보다 큰 것으로 생각되고, 오래도록 대왕의 은혜에 감사할 것이다.”라고 하여 복호(卜好) 왕제(王弟)를 구출하였다.
그러나 눌지왕이 일본에 가 있는 미사흔(未斯欣)을 더욱 그리워하자 제상은 다시 일본에 갈 결심을 하고 일본에 들어가 신라를 배반하고 귀순한 것처럼 위장하여 일본왕에게 환심을 산 후 미사흔을 신라로 도망시킨 후 본인은 붙잡혀 사형을 당하였다. 한편 제상의 부인은 바닷가에 나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의 전설도 전해진다.
건물 구조상 기단은 화강석 세겹대 쌓기를 하였고, 전열의 기둥은 둥근 화강석 주초석 위에 두리기둥이며 그외는 네모난 주초석에 각기둥으로 되어 있다. 주두와 공포부분, 도리는 단청을 입혔고 그외는 붉은 주칠을 하였다. 우측에는 방이 있고 좌측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광의 출입은 측면의 두짝 미닫이 판문을 사용하고 방은 내삼문안의 정면에서 외짝여닫이로 출입하고 있다. 우측벽 부분에 작은 퇴창이 벽체 하부에 있다. 경양사 옆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3량가 맞배지붕 양식의 좌우가 풍판이 달린 모선제가 방+마루+방으로 배치되어 있다.
<참고문헌>
1. <강릉시 문화재대관> 강릉시.1995
2. <강릉의 문화유산> 강릉시. 2000
3. <강릉의 역사와 문화유적> 강릉대학교 박물관. 강릉시.1995
4. <강릉의 문화유적> 강릉문화원. 1998
5. <임영문화대관> 강릉문화원. 1982
6. <강릉사우자료집> 강릉문화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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